좌절된 이상과 허무한 정도전의 최후

국방 정책에 있어서도 독보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동북면 도 선무 순찰사 시절에 군·현의 지계를 정하고 성곽을수리하게 하는 것은 물론, 참호까지 파게 하여 국경 지대의 안보를 강화했다. 그리고 진법(陣法)까지 창안한 것으로 보아 군사 전략가로서의 자질 또한 뛰어났음을 알 수있다.

도무지 그 한계를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분야에걸쳐 건국의 기초 작업을 이끈 셈인데, 정도전이 없었다면 조선 왕조가 과연 순조롭게 출발할 수 있었을까 하는의심이 들 정도다.

정도전의 이러한 공적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명민함이주효했지만 그보다는 불우했던 시절 자학에 빠지지 않고독서와 사색으로 능력을 다져 나간 덕분이다. 이런 정도전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한 인간이 좌절의 질곡에서 그것을 오히려 자기 연마의 시간으로 활용하여 인생의 성취를이루어 낸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은 당시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삶의 태도였을 뿐더러, 더 나아가 뿌리 깊은 우리 민족의 성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사 모든 일은 양면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정도전이 자신의 뛰어난 능력으로 각 방면에서 대단한 업적을 만들어 낸 것은 사실이지만, 독단적인 업무 수행으로 다른 사람들의 기회를 빼앗게 되어 이에 대해 질시하고 견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역사는 천재 한 사람의 독주를 용납하지 않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

정도전은 타고난 성품이 날카롭고 도전적이었으며 타협적이지 못했다. 이와 같은 천성은 스승인 이색과 반목하고 대립하게 되는 결정적 요인이 되기도 한다. 정도전이 처음 유배되게 된 이유도 원명 교체기의 외교적 현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정에서 그에게 원의 사신을 영접하는 책임을 맡기려고 하자, “그렇다면 나는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버리든지 아니면 붙잡아서 명나라로 보내 버리겠다.” 하고 말할 정도로 극단적이었던 그의 성품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그는 구세력과의 권력 투쟁에서 항상 선두에 나섰으니 당연히 주위에 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허무한 최후

건국 후 조선은 명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으나 태조 5년(1396)에 표전문( 사건으로 관계가 文)악화되었다. 명 태조 주원장은 조선에서 보내 온 표문 중에 예의에 벗어나는 문장이 있다면서 작성자로 정도전을 지목하여 그를 명나라로 끌고 오라고 요구했는데, 명은 주원장이 사망할 때까지 이 문제를 가지고 조선을 괴롭혔다.

조선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십 명의 사신들을 명에 보냈지만, 명은 사신을 구속하거나 유배시키는 등 계속해서 횡포를 부렸다. 당시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10명이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명과의 갈등이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점점 악화되자, 마침내 정도전은 과거에 자신이 그렇게도 반대했던 요동 정벌을 건의하게 되었다. 정도전은 군관뿐 아니라 문관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만든 병서 인『오진도』를 기본으로 중앙 관료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켰고, 지방에도 군사 훈련을 관리·감독할 훈도관을 파견했다. 또 이를 감찰하기 위하여 순군 천호를 파견하였는데, 이때 진법에 무능한 사람은 아무리 직위가 높은 무관이라 할지라도 처벌하는 등 출병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진행되자 그동안 정도전의 독주로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의 불만이 겉으로 나타나기시작했다. 특히 그들은 정도전이 자신들의 힘의 배경인사병(私兵)을 관군으로 편입시켜 지휘 체계를 통일하려고 하자 극도의 반감을 표출했다. 그 중에서도 이방원의위기 의식이 가장 컸다. 사실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개국의 최대 공로자인 자신을 제쳐 두고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 대해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 배경에는 재상정치를 꿈꾸는 정도전이 있었기 때문에 정도전에 대한경계심과 감정의 골이 깊은 상태였다. 이것은 결국제 1차왕자의 난을 불러온다.

『조선왕조실록』은 ‘1차 왕자의 난’또는 무인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 불리는 조선 초의피비린내 나는 살육극에대해, 정도전 일파가 왕의 사후에어린 세자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이복 왕자들을 제거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것을 눈치 챈 이방원이 먼저 기습공격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긴박했던 순간을 실록이전하는대로 살펴보자.

태조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은왕의 병이 위급함을 기회로 삼아 왕자들을 궐 안으로 불러들여 그들을 죽이기로 도모했다. 드디어 운명의 8월 26일, 왕의 안위가 걱정이 된 왕자와 근친들은 근정전 밖의한 별채에 모였다. 그러나 정도전 일파의 계략을 미리 알아차린 이방원은 부인 민씨가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잠시 사저로 나갔다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후 다시 궐안으로 돌아왔다. 왕의 병세가 급박하니 왕자들은 시종을두지 말고 혼자 몸으로 대궐에 들어와 태조를 알현하라는전갈을 받은 직후였다. 이미 밤이 깊었는데 궁문에 불이없는 곳이 여러 군데 있어 지척을 분간하기조차 어렵자이방원의 의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이방원은 형들을 불러내어 자신이 파악한 사태를 설명하고 급히 궁을 빠져 나와 미리 연락이 되었던 이숙번과 조영무, 처남인 민무질, 민무구 형제 등과 합류했다. 전체 병력 수는 기병 10명, 보병 9명에 불과했는데, 이때에는 이미 개인이 가지고 있던 군권을 회수한 뒤라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사전에 충분히 준비된 거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병장기도 부인인 민씨가 숨겨놓았던 것들로 겨우 충당할 수밖에 없었다.

궁지에 몰리자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빼 든 이방원 일행은 처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했다. 그들은 일단 이숙번의 제의로 정도전 일행이 모여 있는 남은의 소실 집으로 몰려갔다. 그곳에서 이웃집 세 채에 불을 지르고 매복해 있다가 정도전 일행이 놀라서 뛰쳐나오자 바로 척살해 버렸다. 심효생, 장지화 등은 현장에서 맞아 죽었고 정도전은 이웃집에 숨어 있다가 목이 잘려 죽었다. 남은은 간신히 도망쳤으나 나중에 잡혀서 주살되었다. 그 날 방원은 자신의 적이 될 만한 인물들을 모두 제거하였고, 자신의 이복동생인 방번과 방석 형제까지 참살하였다.

실제로 정도전이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시 권문세가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과정을 통해 실제적인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도전이 그렇게 허망하게 이방원에게 당한 것은 의문으로 남는다. 더구나 요동 정벌을 위해 군사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시점임을 감안한다면 더욱 납득이 되지 않는다. 지나친 자신감으로 방심한 탓이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할 뿐이다.

평소에 정도전은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고, 장량이 한 고조를 통하여 천하를 얻은 것이라고 얘기하며 자신을 장량에 비유했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자기과신이 결국 화를 불러온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당시에는 개인의 군사력이 혁파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공격당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도 그의 죽음에 있어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하겠다.

정도전은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에 있어서도 군신 관계라기보다는 내심 혁명 동지로 생각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점에 대해서는 평소 정도전을 전폭적으로 신임한 이성계의 태도로 보아 이성계도 마찬가지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전폭적인 신임으로 인해 이성계에게 지나치게 의존했던 것이 결국 역설적으로 정도전에게는 비극의 씨앗이 되었던 것이다.

좌절된 이상

정도전은 시대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왕 제도를 받아들여 새로운 왕조를 열었으나, 그가 생각한 정치의 본질은 윤리적 규범을 전제로 하고 근본적으로 백성들의 안정을 도모하는 재상 중심의 왕도정치였다. 즉, 왕이 전권을 행사하지 않고, 재상이 중심이 되어 국가의 각 조직이 자기 역할을 해 나가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근대적 의미의 민주주의 정치 제도와 상당히 유사하다. 이러한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도전은 대간(臺諫)의 견제 기능을 강화하고, 국가의 근본을 바로 세우기 위한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는 등 국가의 기본 체제를 잡기 위한 노력을 밤낮으로 기울였다.

정도전의 의도대로 되었다면 더 발전되고 진보한 조선을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의 허망한 죽음은 자신은 물론 조선의 불운이며 우리 나라 전체의 불행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갑작스런 정도전의 죽음은 역사가 언제나 예상한 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때로는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이 의외의 결과를 불러오기도 하는 것이다.

만일 이방원이 치밀하게 계획하고 충분한 준비를 갖춘 후에 정도전을 공격하려 했다면, 오히려 상황은 역으로 정도전이 이방원을 제거하는 쪽으로 바뀌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정도전 등보다 서둘러 움직였던 것이 오히려 목적을 달성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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