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과의 기싸움, 한양을 도읍지로

한양으로 도읍지를 정하다

조선이 개국한 뒤, 무학은 왕사가 되었고 ‘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 (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이라는 불교 최고의 책임자가 되어 묘엄존자’ (妙嚴尊者)라는 호를 받기도 했다. 또 이성계의 생일 잔치에 전국의 불교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무학으로 하여금 불교의 이치를 가르치도록 했는데, 여기서 무학은 “불교의 자비와 유교의 인(仁)은 하나다.” 하는 내용을 가르쳤다고 한다. 또 이성계에게 모든 사람을 하나로 보고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정신을 강조하며, 죄수들을 풀어 줄 것을 건의해 실제로 많은 죄수들이 풀려났다고 한다.

조선을 창업한 후 이성계는 도읍을 옮길 계획을 세우고, 도읍지로 정할 땅을 찾아 달라고 무학에게 부탁했다. 이에 전국을 돌아다닌 끝에 마침내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무학의 절대적인 공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얽힌 유명한 일화 한 가지를 말하자면, 무학이 이성계와 함께 한양 땅에 들어와 지금의 왕십리 부근에 이르렀을 때, 이성계가 이곳이 좋겠다.” 하고 말하자”십리를 더 가서 터를 잡아야 한다.” 하고 무학이 대답했다. 그리하여 왕십리(往十里)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당시 무학이 인왕산을 궁궐의 뒷산인 진산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정도전이 서쪽에 있는 산을 진산으로 삼는 법은 없다며 북악산을 진산으로 삼게 했다고 하는데, 이 때 정도전과 무학 사이에 보이지 않는 힘 겨루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이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한 것이나 서울의 진산을 북악산으로 정하고 경복궁 등의 궁궐 이름도 정도전의 뜻대로 지은 것을 보면, 결국 무학은 정도전의 위세에 밀렸던 것 같다.

한양에 도읍이 정해진 뒤 이성계는 회암사에 무학의 스승인 지공과 나옹의 탑을 세우게 했고, 무학을 왕사로 극진히 대접했다. 이렇게 5년을 보낸 뒤 무학은 늙었음을 핑계로 모든 직책을 사양하고 용문산으로들어갔는데, 그해에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고 정종이 왕위를이어받았다.

명리를 초탈한 만년의 고매한 삶

1402년 5월, 조선의 세 번째 왕 태종이 무학을 회암사로 불러 사람들에게 불법을 가르치도록 했으나, 무학은반 년 만에 다시 사직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무학은 사람들과 가까이 하기를 싫어하며 조용히 참선에 드는 것을 즐겨 했다. 금강산에 들어간 무학은 3년 동안 수도에만 열중했으며, 병이 들어서 약을 내와도 이를거절하다가 금강산 금장암으로 들어가 세상을 하직했다고 전해진다.

무학은 글을 남기는 것을 싫어해서 저서가 별로 없다.인공음』과 『무학대사어록』은 이름만 전해질 뿐 실제로 발견되지 않고 있다. 또 무학 비결이라는 필사본이 있으나실제로 그가 지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현재 그의 저서가분명하다고 전해지는 것으로『불조종파지도』가있다.

이러한 이유로 무학에 대해 많은 민간설화가 떠돌게되었고, 따라서 그가 가진 불교 정신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었다. 때문에 유학자들 중에는 그를 요승이라고 평가절하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이색은 무학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다.

스님의 성품은 본질을 숭상하고 꾸미는 것을 싫어했다. 음식을 매우적게 먹었고 남은 것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늘 말하기를, “8만 가지 행실 중에아이들 하는 짓이 제일이다.” 라고 했는데, 무릇 스님이베푸는 일에 아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사람을 공경하는 마음과 사물을 아끼는 정성은 모두 스님의 지극한마음에서 나왔는데, 무슨 일이든 억지로 하려 하지 않는것은 스님의 천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색의 말처럼 무학은 물욕이나 권력욕이 없었으며,특히 정도전과 대립 관계에 있으면서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맞서지 않았다. 다만, 이성계가 불교 세력인 무학과 신진 유교 세력인 정도전을 최대한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학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지만, 창업 후에는 모든 명예와 이익을 거절하고 불법에만 정진하며 조용한 만년을 보냈다.

무학은 당시 유학자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지만 실제로 그가 권세를 누렸다든지, 부정축재를 했다든지, 또 음란한 생활을 일삼았다는 비난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무학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 가는 유교 세력에 맞서지 않고 다만 조용히 불도에 정진하며 산 속에서 은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무학의 행보에 평소 사람에 대한 의심이 많았던 태종도 그의 행동과 인품을 높이 평가하여 회암사에 무학의 탑비를 세우게 하였고,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였던 변계량을 시켜 무학을 찬양하는 비명(碑銘)을 짓게 하였다. 훗날 남산 위에 국사당이 세워져 무당들이 그곳을 떠받들고 민중들이 찾아와서 복을 빌었는데, 이곳에 무학대사의 영정을 모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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