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고의 세월을 견뎌 새 시대를 개척한 정도전

새 시대를 꿈꾸며 조선을 설계한 무소불능의 천재 정도전

정도전은 뛰어난 정치가이자 전략가이면서도 조선사에 있어서 부정적인 존재로 치부된 비극적인 인물이다.그는 건국 과정에서 수많은 개혁을 주도하고 새 왕조의기반을 다지는 데 앞장섰지만, 품고 있던 포부를 채 펼치지 못하고 이방원 일파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 후 조선 시대 내내 반역의 원흉으로 매장되고 만다.

정도전이 고려 말의 혼란기로부터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무소불능(無所不能)이라고 할 만큼모든 방면에 소양이 깊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탁월한 현실 감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의 이해에 따라 얼마든지 정책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현실주의자였다. 고려 말 우왕의 요동 정벌 당시에는 친명을 주장하며 반대했다가, 건국 후에 상황이 달라지자요동 정벌을 추진했던 점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정도전은 천민 지역에서의 귀양 생활과 긴 유랑생활을 통해 백성들의 고통을 직접 목격하고 백성을 잘살게 하는 것이 올바른 정치의 방향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윤리적 기준을 바탕으로 한 ‘재상 중심’의 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이와 같은 정도전의 정치적이상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지가 강했던 이방원에게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방원에 의해 제거되고만다.

오랜 인고의 세월

정도전은 고려 28대 충혜왕 3년(1342), 경북 영주에서밀직제학 형 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다.장성한 그는 부친의 친구이자 대유학자인 목은 이색의 밑에서 수학(修學)했는데, 정몽주, 윤소종, 박의중, 이숭인등이 당시 그와 함께 공부했던 동문들이다.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명석하여 주위의 주목을 받았고, 특히 유교 경전과 성리학에 능통했다.

정도전은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못하는데다 날카롭고 불같은 일면이 있어 항상 주위로부터 공격을 받기 쉬웠는데, 그는 스스로 이 점을 인정하면서도 평생을 투지와 용기로 일관하며 살았다. 또한 무슨 일이든지 끝까지 관철하는 강인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스승이었지만 훗날 정치적으로 그와 날카롭게 대립한 이색도 이 점을 높이 평가하여, “정도전은 항상 할 일을 다하지 못함이 없고, 어떤 일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는다.” 하고 칭찬했다.

정도전은 스무 살이 되던 해인 공민왕 11년(1362), 진사시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우왕 2년(1375)에 명을 협공하자는 제안을 하러 북원에서 사절이 오자, “공민왕이 사남(명)정책을 세웠으니 사북(원)은 불가하다.” 하고 끝까지 반대하다가,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친원파의 미움을 사 회진현(전라남도 나주 관하의 천민 거주 지역)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그의 태도는 공민왕의 유지를 이어받자는 뜻도있지만, 원명 교체기의 국제 정세를 꿰뚫어 본 일면이 강하다.

정도전은 이때부터 10여 년 이상 불우한 시절을 보내야 했는데,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삼각산(서울 북한산의 다른 이름) 아래에 초막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독서로 세월을 보냈다. 이 시절에 겪었던 고생이 얼마나 심했던지 자신의 호를 삼각산의 모양을 본떠 ‘삼봉’(三峰)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절치부심하던 정도전은 정치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을 강력히 지원해 줄 힘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떠오르는 실세로 여겨지는 이성계의 밑으로 들어가서 재기를 모색하게 된다.

암중모색의 세월 속에서 때를 기다리던 정도전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우왕 10년(1384)에 정몽주가 명나라에 사절로 가게 되면서 자신과 함께 갈 사람으로 정도전을 추천한 것이다.

외교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돌아온 정도전은 얼마 동안 성균관 좨주(성균관 관직 중 하나)로 있었다. 그러다가 스스로 외직을 청하여 남양 부사로 있으면서 백성들의 생활을 직접 경험하고 선정을 베풀기도한다. 우왕14년(1388), 드디어 이성계의 추천에 의해 성균관 대사성으로 중앙 관계에 복귀한 정도전은 그의 생애 중 가장화려한 시기를 펼치게 된다. 일생일대의 최고 후원자인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맡게 된 것이다.

고려 말 정치 투쟁의 선봉에 서다

위화도 회군 후에 이성계와 그를 따르는 신진 세력들은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논리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왕으로 옹립했다.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므로 우왕의아들 창왕 역시 왕씨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조정에 있어서 구세력들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기때문에 조정을 장악하기 위한 신진 세력과 구세력의 싸움은 마지막 정점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당시 고려 조정의상황을 살펴보면 병권은 이성계가 완전히 장악하여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나, 구신과 세족들은 고려 조정에 대부분 남아 수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두세력이 서로를 견제하는 묘한 대치 상황이 계속 되었다.

특히 양 세력 간의 이해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토지와 군사 제도의 개혁은 실권의 향방이 결정되는 사안인만큼 충돌이 심했지만 결국은 병권을 쥐고 있던 이성계측의 의도대로 관철되었다. 이 과정에서 양 세력간의 반목이 극에 달하였음은 물론, 군제 개편은 이성계파 내부에서도 시기와 반목을 싹트게 하였는데 특히 이방원이 정도전을 질시하고 의심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양 세력이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을 때, 구세력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못한 공양왕은 이성계가 휘하 세력들의 무리한 요구를 제압하지 않고 오히려 방관하고 조장한다는 불만을 갖게 되었다. 또한 이성계는 이성계대로공양왕이 자신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으면서도 자신을의심하기만 하고 개혁 추진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데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양자 사이의 틈은 점점 벌어지게 되었고, 결국 이성계는 이런 상황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사직하고 평주 온천으로 가서 은둔해 버린다. 하지만 이성계의 이러한 태도는 실제로 은퇴를 원했다기보다 자신의 정치 노선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왕과 구세력들에 대한 일종의 경고였다.

신진 세력에게 있어 힘의 중심이었던 이성계가 사직하자, 구파는 이성계 세력을 집중 탄핵하여 일시적으로 조정에서 몰아낼 수 있었는데, 이때 정도전도 봉화현으로 유배되고 말았다. 당시 구세력은 정도전 등 신진 세력들의 대부분이 사대부가 아닌 천한 신분 출신인 것을 집중 공격하여, 개혁 추진의 의도가 자기들의 천한 뿌리를 숨기기 위해 본래의 뿌리를 제거하려는 불순한 음모에서 출발했다고 몰아붙였다. 결국 정도전은 ‘가 풍이 부정하고, 주관이 확실하지 못하여 관리로 등용하기에 부적합한 인물’이라는 이유로 탄핵되어 직첩(職牒)과 공신녹권(功臣錄券)이 회수되고 일가족이 서인으로 강등되는 화를 당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오래가지 못했다. 힘의 중심은 이미 이성계에게 쏠려 있었고, 이성계가 실제로 은둔을 원했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구세력은 은둔하고 있던 이성계가 때마침 말에서 떨어져 당분간 돌아올 수 없게 되자, 이 기회에 눈엣가시 같은 이성계 휘하의 신진 세력들을 모두 제거하기 위해 유배된 사람들을 극형에 처하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에 계속해서 방관만 하다가는 자기 세력의 몰락을 자초하게 된다고 판단한 이성계 일파는, 이방원이 선두에 나서서 구세력에게 있어서 최후의 보루인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하는 등 구세력을 무력으로 제압하여 정국에 일대 반전을 불러온다. 이로 인해 고려 조정은 이성계 세력이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고, 정도전도 유배에서 풀려나 정계의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때 사지(死地)에서 정도전을 구해 냈던 이방원이 나중에 정도전을 죽이게 되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392년 7월, 마침내 34대 475년간 이어졌던 고려 왕조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 급격한 변동으로 민심이떠나는 것을 염려하여 얼마 동안은 고려의 국호와 제도를그대로 유지했으나, 새로운 왕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그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각 분야에서 개혁이 잇달았다.그 중심에는 언제나 다재다능한 식견과 특유의 돌파력을가진 정도전이 있었는데, 이때가 정도전으로서는 최고의절정기이자 자신의 경륜을 현실 정치에 펼칠 수 있었던황금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정도전은 가난하고 권세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어려서는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으며, 12년 동안 관직에 있었으나 주요 직책은 거의 맡지 못했다. 그나마 배원을 주장하다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친원 세력에 의해 탄핵을 받고 유배되어 10여 년을 유랑을 하면서 보냈다. 42세인 1383년에 겨우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감으로써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으나, 위화도 회군 후에 구세력과의 권력 투쟁에서 항상 선봉에 나서자 견제와 질시를 집중적으로 받아 또다시 유배되는 등 청·장년기에는 결코 평탄치않은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그가 5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지만, 결국 자신의 뜻을 펼치기도 전에 죽임을 당하는 불행한 인물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조선을 창건한 후 죽을 때까지의 짧은 기간 동안도저히 한 사람의 능력으로 이루어 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업적을 남겼는데, 실로 놀랍다는 말 외에 달리표현할 길이없다.

정도전은 우선 새 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제일 먼저 군사력을 확충하고자 중국 역대의 병법을 참고로 하여 오행 진출기도』, 『강무도』등의 병서를지어 군사를 훈련시키도록 하였다. 외교에 있어서도 건국에 따른 사은사(謝恩使)로 직접 명에 다녀왔을 뿐만 아니라, 여진족과의 관계를 의심하는 명에게 해명하는 표문(表文)을 작성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문덕곡」, 「수보록」,「몽금척」등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일의 어려움을 일깨우는 악곡을 지어 후세 사람들로하여금 교훈으로 삼게 했다. 그리고 국가의 제도와 운영의 근본이 되는『조선경국전』을 지었는데 이것은 이후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의 바탕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역사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고려국사』37권을 편찬하였고, 지방 행정 방법을 기술한『감사요약을 만들어 지방 행정의 근간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리고 중앙 관료들의 임무와 경비 및 감사 제도에 이르기까지의 행정 지침을 정한 『경제문감』을 썼고, 무학대사와 함께 새 도읍지를 한양으로 정하고 실제로 궁궐을 설계한후, 그 아름다움을 찬양한 신도 팔경시까지 지어 바쳤다하니, 정도전의 무소불능한 능력은 찬탄의 대상이 되지않을 수 없다. 그 외에도 당시 명망가들의 필적과 시문을채집하여 만든『국군영진적』, 배불 정책의 정당성을 역설한『불씨잡변』도 그의 작품이었으므로 그의 학문적 소양은 가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