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 정벌의 허와 실
우왕과 최영은 왜 무리한 정벌을 강행하여 왕조가 멸하게 되는 화를자초했을까? 당시 최고 통치자로 군림하
고 있었던 그들의 정치적 입장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최영은 우왕의 가장 가까운 측근으로서 그를 보필하는 정권 책임자였다. 따라서 국가 보위 차원에서 예민한 문제일 수밖에 없는 명과의 영토 분쟁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이었다. 아무리 명의 압력이 거세다고 해도 100년 만에 겨우 회복한 옛 영토를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순순히 내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최영으로서는 명의 의사가 철회되지 않는 한 정면 대응을 해서라도 국토를 수호해야 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만약명의 압력에 굴복하여 철령 이북 지역을 명에게 넘겨 준다면 영토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반대 세력에 의해 공격받게 될 것이 뻔했다.
이러한 정치적 현실 때문에 요동 정벌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셈이다. 반면에 이성계는 권력의 중심에서 비껴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 입장에서 반대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았다. 최영과 이성계의 성향과 태도의 차이도 간과할 수 없는데, 최영은 강골 무인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이성계는 유연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위화도 회군은 이성계라는 보잘 것 없는 변방 출신의 일개 장수를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구 왕조를 멸하고 새 왕조를 탄생시키는 역사적 대반전의 전주곡이었다.
그렇다면 위화도 회군은 준비된 쿠데타인가?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돌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인가? 당시 상황을 면밀히 살펴보면 일단 애초부터 권력을 탈취할 목적으로 계획된 사건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먼저 이성계는 쿠데타를 추진할 정도로 높은 위치에 있지 않았다. 게다가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할 계획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출정을 무조건 반대하기보다 출정에 동조하는 체 하였다가 병력을 장악할 기회를 노렸을 것이다. 그보다는 원하지 않던 출정에 나서기 앞서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히게 되자 그대로 압록강을 건너는 것보다 철군을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였지만, 이 같은 자신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어쩔 수 없이 회군을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회군을 결심한 이성계는 다른 장병들의 의향을 떠보기 위해 요동 정벌을 포기하고 본거지인 동북면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소문을내는데, 그때 제일 먼저 조민수가 허둥지둥 달려와 그의 뜻에 동조하였고 결국 모든 군사가 그의 뜻을 따르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보면 이성계는 용맹스러운 장수이기도 했지만 임기응변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정세의 변화를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활용하는 데에도 할 수 있다. 해를 사지 않기 위해 개경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왕의 일행과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속도를 조절하여 움직이는 등 명분상으로 자신에게 불리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하는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이성계는 뛰어난 무인이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역량도 탁월했고 매우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말년의 한
이성계가 새 왕조를 창업하고 수창궁에서 왕으로 즉위한 날이 1392년 7월 17일이었는 데, 이때 그의 나이 이미 58세로 즉위하자마자 서둘러 세자를 책봉해야만 했다. 이성계는 두 명의 부인과 여덟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으로는 방우, 방과, 방의,방간, 방원, 방연 여섯 형제가 있었고,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으로는 방번과 방석 두 형제가 있었다.당시에는 지방 관리들이 고향이나 근무지에는 향처(鄕妻)를 두고, 중앙에서 기거할 때는 경처(京妻)를 두는 풍습이 있었다. 따라서 이성계가 젊어서 혼인한 한씨는 향처, 두 번째 부인 강씨는 경처인 셈이었다. 그런데 한씨는이성계가 즉위하기 1년 전에 죽었기 때문에 결국 강씨가왕후로서의 영광과 역할을 고스란히 안게 되었다.
원래 강씨는 황해도 곡산 사람으로 그의 아버지 강윤성은 지방에서 알아주는 대부호였다. 이성계가 사냥하러나선 길에 곡산 땅에 들렀다가 강씨의 집에서 하룻밤 유숙한 것이 인연이 되어 혼인하게 되었는데, 본래 강씨는미모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장인인 강윤성이 이성계의정치적·경제적 후원자 역할을 해 주었기 때문에 자연히이성계의 강씨에 대한 사랑 또한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말년까지 살갑게 지낸 강씨에 대한 사랑 때문인지, 아니면 노년에 본 자식이 더 사랑스러웠기 때문인지 이성계는 장성한 전처 소생들보다 후처 소생들에 대한애정이 더 깊었다. 이런 상황에서 세자 책봉 문제가 대두되자 강씨는 자기 자식 중에서 왕위를 잇게 할 욕심으로이성계를 졸랐고, 이성계도 내심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적장자 승계의 전통에 벗어날 뿐더러 건국하는 데 있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공이 컸던 터라 자신이 직접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대신 공론에 부치려 했다. 하지만 중신들은 이미 이성계의 뜻을 눈치채고 있었다.
이때 신덕왕후와 정치적 이해를 교감한 인물이 정도전이었다. 강씨는 자신의 소생으로 왕위를 잇게 하기 위해이성계의 측근이자 실권자인 정도전의 도움이 필요했다.정도전은 정도전대로 자신의 이념인 재상 중심의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기 고집이 있고 강한 성품을 지닌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보다는 나이도 어리고 부드러운 성격을 가진 막내 왕자 방석이 세자가 되는 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 했던 것이다.
정치 일선에서 아예 물러나 버렸다. 2년 후, 넷째 아들 방간이 지중추부사 박포의 선동으로 난을 일으키는데, 이것을 ‘2차 왕자의 난’ 또는 ‘박포의 난’이라고 한다. 또다시 골육 간에 권력 쟁탈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세상사에 환멸을 느낀 이성계는 고향인 동북면으로 들어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형 방과(정종)에게서 왕위를 넘겨받아 왕으로 등극한 방원(태종)은, 부자간의 갈등에 대한 백성들의 시선도 부담스럽고 이성계의 노환도 걱정이 되어 이성계가 평소 신임하던 창녕 부원군 성석린을 보냈다. 성석린이 설득하자 이성계는 마지못해 대궐로 돌아왔으나, 울분이 채 가시지 않았는지 태종 2년(1402) 11월 밤 홀연히 대궐을 떠나 소요산에서 잠시 머물다가 함주(함흥)로 가서 다시 칩거하고 말았다. 야사에 의하면 이때 이성계는 태종이 사신을 보내면 모두 죽이거나 잡아 가두고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 소식이 없는 사람을 ‘함흥차사’(咸興差使)라고 부르는 연유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즈음 안변 부사 조사의가 신덕왕후 강씨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 아래 난을 일으켜 이성계가 외지에 거처하는 것 자체가 말썽의 소지가 되자, 방원은 이성계가 존경하던 인물인 무학대사를 보내서야 겨우 그를 대궐로 돌아오게 할 수 있었다.
새 왕조를 창업한 천하의 이성계였지만 그의 말년은 이토록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나날들이었다. 젊어서의 총명한 판단력도 나이가 들자 흐려졌는지, 아니면 늘그막에 얻은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컸던 것인지, 장성한 전처 소생들을 모두 제치고 계비 소생의 막내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우를 범하여 스스로 비극의 씨앗을 뿌리고 말았던 것이다.
노년에 밀어닥친 비극은 이성계에게 엄청난 고뇌와 허탈감을 안겨 주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믿어 왔던 불교에 더욱 몰입하여 궁전 안에 덕안전(德安殿)을 새로 짓고 그곳에서 염불을 외는 일로 하루하루를 살다가 태종 8년(1408) 5월 24일에 74세를 일기로 말년의 한을 삭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