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의 놀라운 법력 시대를 예언하다

시대의 진운을 예견한 놀라운 법력의 고승 무학대사

역사가들은 무학을 요승, 또는 괴승이라고 평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사(大師), 왕사(王師) 등으로 칭송하기도 한다. 또 이성계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정치적 인물로 보기도 하며, 풍수지리에 밝아 한양에 도읍을 정한 인물로 알고 있기도 하다.

무학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지나친 오해와 편견으로 잘못 알려진 부분이 많다. 민간설화에서는 그를 탐욕적이고 정치적인, 부정적 인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그는 평생 수도(修道)에만 전념하며 현실에서의 명예와 이익을 멀리한 인물이었다. 흔히 신라 말의 도선에 비교하기도 하는데, 도선은 풍수지리설로 왕건의 고려 왕조 창업에 크게 기여하고 난 후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산인물이지만, 무학은 변방의 일개 장수에 지나지 않던 이성계를 군 왕으로 이끌어서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로를 세웠으면서도, 그 후 은둔하여 평생 불도를 닦는 데 정진했다. 그러므로 도선과 무학을 같은 인물로 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러면 도대체 무학은 어떤 인물일까?

이성계와의 운명적인 만남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무학(無學)이라는 이름은 그의 호이고, 본명은 자초이다. 삼기(경남 합천)에서 태어났으며, 부모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열여덟 살에 출가해서 소지선사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중이 되었으며, 그 뒤 혜명국사로부터 불법을 배웠다. 혜명국사는 무학에게, “바른 길을 걸을 자, 너 아니면 누구리오.” 하고 말하면서 부도암에서 지내도록 허락해 주었다.

무학과 관련된 일화는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하나를 말하자면, 무학이 참선하고 있는데 근처에 불이 났다. 하지만 불길이 치솟는 와중에도 꼼짝하지 않고 참선에 몰두하는 그를 보고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고 한다. 그 후 무학은 진주의 길상사, 묘향산금강굴에 머무르면서 불도를 닦았다.

1353년, 홀연히 원으로 건너간 무학은 그곳에서 불법을 펴고 있던 인도의 고승 지공을 찾아가 불법을 배웠다. 또 고려의 중으로 마침 원에 와 있던 나옹을 만나 많은 가르침을 받았을 뿐 아니라, 나옹과 함께 원의 풍물을 돌아보기도 했다.

1356년, 무학과 나옹은 고려로 돌아왔고, 이 후 무학은 공민왕의 왕사가 된 나옹으로부터 의발(衣鉢)을 전수받아 법통을 잇게 된다. 후에 나옹은 무학에게 양주 회암사의 수좌(座)가 되기를 권유하지만 무학은 이를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으며, 나옹이 죽은 뒤에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수행에 전념했다. 당시 고려 실에서는 그를 불러 왕사로 삼기를 원했으나 무학은 모두 거절했다.

이성계와 무학이 만난 시기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다만 빼어난 문장가인 변계량이 그의 탑비에 “임신년의 만남이 있었으니 스님의 거취가 어찌 우연이겠는가?” 라고 쓴 것으로 보아 조선이 건국되던 해인 1392년(신년)에 이성계를 만났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민간설화에는 조선이 창업되기 훨씬 전에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아직 장군일 때의 이야기다. 어느 날 함경도 안변 땅에 머물던 이성계가 이상한 꿈을 꾸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때마침 그 마을에 해몽을 잘 하는 노파가 있다고 하기에 찾아가서 물었다. 그러자 노파가 말하기를,

“장부의 일은 이 노파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오. 서쪽으로 가면 설봉산 안에 법력이 뛰어난 스님이 한 분 계시니 그분에게 물어 보시오.” 라고했다. 그길로이성계는노파가말한스님을찾아가물었다.

“어느 시골 마을을 지나는데 그 마을의 닭들이 한꺼번에 울고 집집마다 방아찧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러더니 하늘에서 꽃이 마치 비 오듯 떨어져 내렸습니다. 꿈은 다시 계속되어 저는 어느 집 헛간에 들어가서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짊어지고 나오다가 거울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를 듣고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무슨 불길한 징조는 아닌지요???

그러자 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마을의 닭들이 한꺼번에 운 것은 ‘고귀위’(高貴位, 닭의 울음소리를 한자로 표현한 것)라고 한 것이니 크게 된다는 뜻이며, 방아찧는 소리는 그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또 한 곳간에서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나왔으니 그 모양은 임금 ‘왕(王)자가 아니겠습니까.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고 거울이 깨지면 소리가 나는 것이 당연하니 이것은 왕이 될 징조입니다. 그러나 입 밖에 내지는 마시오.”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고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대목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스님이 바로 무학이다. 이성계가 한창 거사를 계획하고 있을 무렵 무학은 안변에 있는 토굴에 머물고 있었는데, 이성계가 찾아간 곳이 바로 그 토굴이었던 것이다.

고려를 세운 왕건에 대한 설화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 두 설화에 모두 공통적으로 전설적인 승려인 도선과 무학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우연이라기보다 새 왕조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해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는 뒷날 이 일을 기리기 위해 무학이 머물던 곳에 절을 지었는데, 임금 왕(王) 자를 해석했다 하여 석왕사’(釋王寺)라 불렀다

그 밖에도 무학은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창업하려는 야망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결심을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을 때,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을 예언하고 그 방법을 일러 주어 계획을 실행하도록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무학과 이성계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에는 이런 것도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창업하고 왕위에 오른 후 경기, 황해, 평안 감사를 시켜 은둔하고 있던 무학을 찾게 했다. 곡산 고달산의 한 초막에 고매한 선승이 살고 있다는 말을 들은 세 감사는 그를 찾아가 “왜 이런곳에 사시오?” 하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저 삼인봉 때문이오.” 라고 했다. 세 감사는 신분을 숨기기 위해 자기들이 인(印)을 산비탈에 있는 나뭇가지에 걸어두고 온 것을 가리키는 말임을 깨닫고, 그 중이 무학임을 알아차려 이성계에게 데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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