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외교실패와 몰락과정

고려의 외교 실패

고려 말 원이 점점 쇠퇴하고 있을 때, 주원장이 한족(漢族)의 국가인 명을 창건했다. 그동안 원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 불만을 갖고 있던 고려 조정은 새롭게 등장하는 명나라와 친선 관계를 도모했다.

그러나 고려와 명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치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데, 그 중 하나가 친명배원주의자였던 공민왕이 환관들에게 시해된 사건(1374)이다. 이 사건은 공민왕 말년에 그의 정신적 파행으로 인한 궁중 내 살인사건이었다. 하지만 중국 대륙의 패권을 놓고 원과 막바지 대치를 하고 있던 명나라는 이 사건으로 고려 조정을 의심하게 되었다. 거기에 공민왕이 시해된 지 두 달 뒤, 자기 나라로 돌아가던 명나라 사신을 고려 호송관이 살해하고 북원으로 도주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양국 사이에는 극도의 긴장감이 조성되었다.

고려는 명과의 외교에 노력을 기울이면서도 명의 압력을 견제하기 위해 북원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여기에 불만을 가진 명은 더욱 고려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고려 조정도 친원 세력과 친 명세력으로 갈라져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명이 지나친 조공을 요구하며 고려를 거세게 압박하자 점차 명나라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명에 대한 비판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 명은 한술 더 떠서 철령 이북을 요동에 귀속시키겠다며한층 더 고압적인 자세로 나왔다. 철령 이북은 원래 고려의 땅으로 원이 강제로 차지하고 있던 것을 공민왕 때 겨우 회수한 것이었다. 따라서 고려의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고려 조정은 명과 교섭하기 위해 사절을 보냈으나, 명의 자세가 확고한 것을 확인하고 철령위(설치衛)를하기 위한 명의 전진 기지인 요동을 공격할 계획을 세운다. 양국 관계는 점점 험악해졌고, 자칫하면 무력 충돌이일어날지도 모를 상황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려는 정권의 무능함을 드러내게 되는데, 첫 번째가 부족한 외교 능력이다. 외교 사절의 살해는오늘날에도 전면전이 일어날 수 있을 만큼 민감한 사안이다. 따라서 피해국인 명의 보복 조치는 충분히 예상할 수있는 일이었다. 더구나 상대가 강대국일 경우 더욱더 강경하고 무리한 요구를 할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이치다. 따라서 고려 조정은 좀더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사실을 해명하고 설득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했어야 했다.

명나라 사신 살해 사건 이후 화가 난 명은 철령 이북 지역이 원래 원에 속했던 땅이라 하여 자신들이 통치하겠다고 알려 왔다. 그러나 고려는 이에 맞설 만한 명분이 부족했고, 현실적으로도 매우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명은 철령 이북 지역을 실제로 복속하려고 했을까? 공식적으로 통고했으므로 실행 의지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으나, 훗날 명이 그 지역을 조선의 영토로 순순히 인정한 사실로 보아 당시의 태도는 고려 조정을 길들이기 위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중국은전통적으로 요동 이동 지역을 오랑캐의 땅으로 여기며 중국 본토로 편입하는 것을 내심 꺼렸다. 또한, 당시는 북원과 막바지 대치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고려가 아무리 작은 나라였다 할지라도 무력 충돌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실리적 측면에서 외교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고려 조정은 당시 국제 관계에서 힘이 이동하고 있는 방향을 정확히 읽어 내지 못했다. 당시 원은 북쪽의 척박한 지역으로 밀려나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상태였는데도 고려는 원의 패망을 예상치 못하고 관계를계속 유지하다가 명의 의심을 더욱 사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원을 통해 명을 견제하려는 중립 외교의 방편으로볼 수도 있다. 하지만 대세는 이미 명으로 기울었고 원은지는 해였다. 따라서 명과의 관계 정립을 위한 외교에 총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당시는 고려 왕조 말기부터 누적된 폐단들이 민생을괴롭히고 있는 가운데 국토의 남쪽은 왜구가 창궐하고 있었고, 북쪽은 전쟁에 대비해 성을 쌓느라 백성들이 시달리고 있었다. 더구나 고려 우왕은 전쟁 준비의 독려를 이유로 서해도 지방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실상은 개인적인향락 추구의 의미가 더 컸다. 왕의 시중을 들기에 벅차하던 백성들은, 요동을 정벌하겠다며 농번기에 전국적으로군사를 소집하자 자연히 원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이러한 까닭으로 요동 정벌에 대한 반대가 높아지자 우왕은 자신의 친위 세력과 강경파 무인들을 중심으로 비밀리에 정벌 계획을 수립하고,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무리한출병을 감행한다.

위화도회군

우왕 14년(1388), 요동 정벌을 위한 진군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고구려와 발해 이후 중원 공략을 포기했던 우리 민족의 마지막 거병이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민족의 정기를 드높인 일대 쾌거로볼 수도 있지만, 당시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무모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렇게 무리하게 실행된 요동정벌은 이성계의 권력 획득을 앞당기는 결과를 불러왔고,조선 창업을 위한 역사적 무대 장치가 되고 만다.

그동안 명의 무리한 공물 요구와 갖가지 트집에 시달리던 고려는 원에게 빼앗겼다가 100년 만에 회복한 옛 땅을 또다시 명이 지배하겠다고 하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출병을 강행했다. 출병하기 전에 우왕은 사냥을 한다며 해주 백사정으로 떠나는데, 이것은 정벌 계획을 감추기 위한 위장 전술로 볼 수도 있지만, 요동 정벌을 당당히 공표할 수 없을 정도로 정치권 내부의 의견이 분분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정벌 계획을 공표하지 않은 상황에서 우왕은 전면전에 대비해 문화찬성사 우현보에게 개경을 지키게 하고, 왕실의 가족들은 한양 산성으로 옮겨 머무르게 하였다. 3월 중순, 평양으로 출발한 우왕은 다음 달 1일, 봉주에 이르러 그동안 최영 등 강경파들과 암암리에 계획했던 정벌의 뜻을 이성계 등에게도 통보하였다. 이성계는 현실론을 내세워 반대 하였지만, 왕이 이미 출병의 뜻을 세우고 그곳까지 왔는지라 요동 정벌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우왕은 곧바로 평양으로 이동하여 전국의 군사를 집결케 하고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설치하도록하는 등 진군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우왕은 최영을 팔도도통사로 임명하여 평양에서 정벌군을 통할 감독하게 하고, 실제 병력 지휘는 좌군도통사 조민수와 우군도통사이성계에게 맡겼다. 최영은 현지에 나가 직접 지휘하려고했지만 우왕이 자기 주변에 남아 있기를 권하여 출진하지않았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실수’가 된다. 이때 총병력은 군사가 좌우군 합쳐 3만 8,830명, 겸속이 1만 1,634명으로 5만 명이 조금 넘었고 말은 2만 1,681필이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10만 군이라고 부른다.

4월 18일에 평양을 떠난 정벌군은 5월 7일, 드디어 압록강 가운데 있는 위화도에 진을 치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위화도까지 오는 동안 병사들이 탈영하는 사건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정벌군의 사기도 크게 떨어졌다고 한다. 물론 이와 같은 서술은 조선 창업을 미화하기 위한 의도로 볼 수도 있지만, 당시의 출병이 무리한군사 작전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더구나 압록강 부근에비가 많이 내려 부교가 떠내려가고 물에 빠져 죽는 병사까지 생겨나자, 이에 이성계는 그 유명한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워 정벌의 무리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다. 사불가론의 첫 번째 이유는 명에 대한 사대주의적 입장을 담고 있지만,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는 명과 군사적으로 대적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판단으로 이해될 수 있다. 나머지 이유들도 민생과 군사적 측면에서 충분히 납득이 되는 지적이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이 의견을 묵살하고 내관인 김완을 파견하여 진군을 재촉할 뿐이었다.

압록강에 가로막혀 잠시 진군이 지체되고 있는 가운데정벌군의 사기는 점점 떨어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안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이성계가 이미 군대를 동북면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소문은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이렇듯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결국 회군 여부의 최대 변수였던 좌군도통사 조민수마저 회군에 동조하게 된다.

모든 장수들을 회유한 이성계는 5월 22일, 마침내 군사를 되돌려 역사적인 회군을 하게 된다. 회군 시작 이틀 뒤, 성주 온천에 가 있던 왕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고 왕일행은 황망히 자주, 평양, 중화를 거쳐 29일 이른 새벽, 개경으로 환궁했다. 이때 왕을 따른 병력은 겨우 50여 명에 불과했다. 출발할 때에는 한 달 가까이 걸린 길을 5일만에 급히 돌아왔으니 왕의 낭패감은 눈에 보일 듯 훤하다.

6월 1일, 개경에 도착한 이성계는 숭인문 밖 산대암에 진을 치고, 우군은 숭인문 쪽으로, 좌군은 선의문 쪽으로 진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최영의 수성군에게 밀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자, 이성계가 직접 전군을 지휘하여 마침내 왕궁의 담을 헐고 들어갈 수 있었다. 성 안으로 들어간 이성계는 끝까지 왕을 보위하고 있던 최영을 붙잡아 사태를 마무리지었다.

애초에 수성군은 회군 병력에 비해 수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에 회군이 시작되었을 때 대세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요동 정벌을 위해 군사력을 총동원하면서 자체 수비 병력은 등한시했기 때문에 정벌군이 반란군이 되자 고려 조정에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회군 세력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후 최영은 고봉현으로 귀양 보내졌고, 다시 합포, 충주 등으로 이배되었다가 참수되었다. 우왕 또한 강화도로 쫓겨나 이후 잠시 왕위를 계승했던 그의 아들 창왕과 함께 사사됨으로써 사실상 고려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Leave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