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세운 뛰어난 무장이자 최고의정치가 이성계
조선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 있어 태조 이성계에 대한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새로운 왕조를 창업한다는것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큰일로 그 시대를사는 사람들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권력층 내부의 정권 이동은 실제 일반 민중들의 삶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것이한 나라의 멸망과 생성에 관한 것이라 하더라도 말이다.그러나 아무리 왕조 사회라 하더라도 새 나라의 창업은그 시대 전반에 걸친 새로운 가치 체계 및 이념을 정립하게 되기 때문에, 민중들의 생활에도 일대 변화를 가져오게 마련이다.
새로운 왕조에 대한 평가는 창업 이후 사회상의 발전과 당대 사람들의 삶에 어떤 역할을 하였는가를 가지고판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조선은 중기 이후에 지배층이부패하고 지나치게 유교적 윤리관을 고집하는등많은폐단이있었지만, 일단 ‘성공한창업’이라고할수있다.
이런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우리 나라 마지막 왕조의 시조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는 인물이라 할수 있다. 특히 고려 말의 혼란기에 정권을 장악하고 새 시대를 개척한 인물로서 그가 가지는 의미는 더욱 크다.
전란 속에 뜬 별
이성계는 고려 27대 충숙왕 4년(1335, 복위 후 4년),화령부(함경 남도 영흥)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원래전주 사람으로 고조부 이 안사대에 간도 지방인 남경으로들어가 원의 지방관으로서 기반을 닦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에 이르기까지 천호(千戶)정도의 벼슬을 하였다.
이 시기는 원의 쇠퇴기로서 고려 조정에서는 친명배원(親明排元) 정책의 목소리가 높았는데, 급기야 공민왕 5년(1356)에 고려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공략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쌍성의 천호로 있던 이 자춘은 성을 함락시키는 것을 도와 함흥 지방 이북을 고려가 탈환하는데 절대적인 공을 세웠다. 이것이 이성계의 집안이 고려중앙 정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공민왕10년(1361)에는 이자춘이 삭방도(철령 이북 지역) 만호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그 지역 일대의 군사권을 장악하게되었다. 이때 형성된 기반이 후에 이성계가 고려 조정에서 성장할 수 있는 정치적 토양이 된다.
그러나 이성계가 아버지의 후광만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고려 말 혼란기의 수많은전란에서 그가 세운 혁혁한 전공(戰功)이 있었기 때문에가능했던 것이다. 이성계는 난세를 헤치고 자신의 길을열어 나간 인물이었다.
아버지를 도와 쌍성총관부를 공략한 것을 시작으로 박의의 난(1361), 홍건적의 침입(1362),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침입(1362), 최유와 원의침입(1364), 삼선·삼개의난(1364), 왜구 출몰(1380), 여진족 호발도의침입(1382)등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했고, 그때마다 이성계는 상승일로를 달렸다.
이러한 발군의 전공은 이성계가 고려 정계에서 확고부동한 지위를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아무리 뛰어난 장수라 하더라도 싸우는 족족 모두 승리하기는 어렵다. 이성계가 전쟁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무장으로서 그의 능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수있다.
이성계에게 패해 겨우 목숨만 건진 원나라 장수 나하추가 후에 탄복하며 말하기를, “이자춘이 자기 아들 자랑을 천하에 늘어놓아 우습기 그지없었는데 직접 상대해 보니 과연 허풍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고 했다는 일화가있을 정도다.
이외에도 이성계의 무예에 대한 수많은 예화가 전해지고 있다. 활을 잘 쏘아서 명궁 소리를 들었으며, 완력도엄청나서 배梨]만한 크기의 화살촉을 사용했다고 한다.그 화살촉은 장사로 이름났던 그의 아버지조차 사용할 수없어서 버린 것을 이성계가 주워서 사용한 것이라고 하니, 그의 힘과 재주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 있다.
타고난 체력을 가진 이성계는 어린 시절부터 사냥을통해 육체를 단련하였고, 수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전세(戰勢)를 읽는 순발력과 정확한 판단력, 지략과 전략적사고를 기르게 되었다.
유연한 정치감각
이성계처럼 크게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은 주위로부터질시와 경계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다. 게다가 이성계에게는 지방 출신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크게 탄핵받는 일 없이 중앙 정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던 것을 보면 그가 가진 정치적 수완이 얼마나 뛰어났는가를 알 수 있다. 물론, 크고 작은 전란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던 당시 상황에서 그와 같은 뛰어난 무인을 그대로썩혀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성계가 가진 인간관계와 처세술 역시 무예 못지 않게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는 주변 사람들을 적으로 만들기보다 자신에게로 융화시키는인물이었다. 따라서 조준, 권근, 정도전 등신진 사대부들과의 교류를 통해 지지 세력을 넓혀 갈 수있었고, 결정적 순간에 그들의 도움을 받아 조선을 창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점은, 신진사대부들과의 교류는 그가 고려 정계의 중심 세력이 되기이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 정치적목적에 따른 결합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오랜 시간 동안의 교류를 통한 동지적 의기 투합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이성계는 일생 동안 불교를 정신적 지주로 삼았는데, 그럼에도 조선 개국 당시 불교에 대해 배타적인 유학자들과 손을 잡은 것을 보면 그가 개인적인 믿음을 초월하여 시대적 요청과 필요를 이해한 탁월한 감각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고려 말은 지나치게 커진 불교계의 부정부패로 인해 그 폐단을 뿌리부터 없애지 않고는 사회 개혁을 이룰 수 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개인적인 믿음과는 다르게 배불 주의자들의 당위성을 인정한 것인데, 사실 그렇게 행동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처럼 시대의 흐름을 꿰뚫어보아 그때까지는 주변 세력에 불과했던 개혁 성향의 인사들을 포용한 이성계의 뛰어난 처세술은 결정적인 시기에 ‘조선 건국’이라는 대업을 이루는 계기를 만들어 낸다.